페일 그레이(Pale Grey)
우리의 지금은
2010. 11. 01.
1. 돌아오는 길 (feat. 박미란)
2. 그의 지금은 (feat. 김태헌)
3. 장마 시작 (feat. 지혜현)
4. 무너지다 (feat. 피경진)
5. Petal interlude
6. 바람이 멈추지 않네요 (feat. 김태헌)
7. 기억 한 조각 (feat. 이인호, 피경진)
8. 그날과 똑같은 설렘 (Inst.)
9. 그녀의 지금은 (feat. 피경진)
10. 안녕 안녕 안녕 안녕 (feat. 김태헌)
11. 너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아서 (Inst.)
전곡 작사, 작곡, 편곡: 강정훈
음악에서 정의하는 다양성이 오직 장르에만 대입되는 건 아니다. 전문가가 세워놓은, 넥타이처럼 조여진 규칙에 도입되는 표현법들 역시 매번 고민해야 할 요소다. 기존의 문법에서 청정해역 같은 아이디어가 필요한 것이다.
산업 구조에 길든 프로들보다, 머릿속에 별도의 울타리가 처지지 않은 아마추어에게서 이런 신선함은 더 자주 발견된다. 서른이 넘어서도 작곡 공부를 하던 두 명의 남자가 온라인에서 마음 맞아 결성한 페일 그레이(Pale Grey)도 그 매력을 가지고 있다.
이번 앨범은 개인적인 사정으로 강정훈 혼자 작업하게 됐지만, 완성도는 더 높아졌다. 흔히 아마추어의 음악이라면 그저 아마추어리즘에서 끝날 수 있겠지만, 아마와 프로의 경계선을 모호하게 할 만큼의 멜로디도 갖춰 놨다.
음악의 영향은 전적으로 1990년대 FM 라디오를 주름잡았던 뮤지션들에게서 받았다. 이 분야에선 이미 노 리플라이(No Reply), 에피톤 프로젝트(Epitone Project)가 홍대 신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지만, 덜 익은 소리가 두 팀과는 또 다른 부분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윤상의 건반 코드 워크와 매우 흡사한 '돌아오는 길'은 윤상 워너비의 재해석이다. 후반에 접어들며 가파르게 달리는 음표가 극적인 장면을 연출한다. '그의 지금은'은 과거의 발라드 향수를 끄집어내는 곡. 규칙성 있게 연결되는 선율과 편곡이 정통적인 방향을 따른다. 그럼에도 산뜻하게 들리는 건 작업 환경에 따른 악기의 쓰임이다. 빈약한 조건에서 절정을 그리기 위해 도입한 드럼과 기타의 움직임이 생기 있다. 근래에 접할 수 있는 세련됨은 없지만, 이런 결합들이 과거의 향수를 더 불러일으킨다.
작곡가 팀답게 보컬은 철저히 외주다. 여기서 아쉬움이 가득하다. 김태헌, 이인호 같은 남성 가수들은 본인들의 역할을 완벽히 소화하며 곡의 맛을 살렸지만, 그에 반해 여성 가수들은 매우 실망스럽다. 특히 피경진의 능력은 많이 부족하다. '무너지다'에선 후렴 음역대가 제대로 구분되지도 않으며, '그녀의 지금은'에서의 창법은 김태헌과 비교될 정도로 상당히 건조하다. 제 몫을 해낸 건 '기억 한 조각'뿐일 정도. '돌아오는 길'에서 고음을 말끔하게 처리 못 한 박미란 등 여자 보컬 선정은 미스 캐스팅이다.
음반에서 시도하는 것들이 참신하다고 말할 순 없다. 전체적으로 완벽을 위해 다듬어가지는 과정에서 나왔단 느낌이 더 든다. 그럼에도 다르게 들리는 건 그 손질 단계에서 등장했기 때문일 거다. FM계 추종자들 모두가 빈틈없는 가공의 생김새를 갖추지 않았나.
프로의 정의를 단적으로 내린다면, 기술을 생업으로 이어나가는 사람일 것이다. 페일 그레이가 이 점에서 자격은 갖추고 있진 않지만, 매서운 가락과 기본기가 결코 부족한 수준은 아니다. 완성을 위해 노력했던 습작이 어느새 특색으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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